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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내적 동력

나의 이야기

by 포근한 사람 2024. 1. 22.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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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내적동력”이 바로 덕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인간의 외적 동력을 중시한다면 아마 우리 사회는 폭력과 무질서가 난무하게 될 것이다. 덕은 인간의 카리스마이며 덕은 이성보다 욕망이 가까우며 욕망의 기준이 우리 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리드쉽을 나타나게 된다. 욕망을 기초해서 출발한 일들만 대부분 잘할 수 있다. 살면서 뭘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욕망이 없는 사람이다. 즉 자기의 문제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는 여태 많은 세월을 욕망에 대한 일부의 부재에서 살아왔다. 어쩌면 부분적인 후회를 안고 살아가지 않나 싶다.
 
한 국가를 만들 때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만 보며 국가를 만든다면 그 국가는 진정한 국가가 될 것이지만 만약 행복한 국가를 만들어 놓고 여러분 모두가 행복해하며 살아가라 한다면 그 국가는 진정한 행복의 국가가 될 수 없다. 각 개인의 행복이라는 기준이 다르며 행복의 이념, 가까이 다가오는 행복의 기다림, 이러한 문제들이 모두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고, 어느 정도 사회적 위치에 도달한 사람들의 말들은 아주 쉽게 믿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느 고승의 말이라면 바로 곧 진리인양 믿고 따르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만약 그 고승의 진리의 깨달음이 더욱 깊어 들어간 훗날에도 당시의 진리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을까? 진리의 기준을 달라 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우리의 선입견은 종교의 지도자나 사회적으로 자리 잡은 사람들을 먼저 믿고 들어간다. 산사에서 공부하는 스님이라는 깨달음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이유로 범위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들의 앞선 생각일 수 있다. 인간은 욕망을 지닌 존재다. 욕망은 충족할수록 더 강해진다. 인간의 욕망은 제한될 수 없는 것이다. 종교를 보면 감각적인 현상세계는 헛된 세계일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종교에서 10개월의 교리 공부를 거치는 동안 종교의 진리에 대한 깊이는 관심이 없고 형식만 갖추었다. 지금도 종교에 대한 감각은 떨어져 있고 믿음 역시 많이 부족하지만, 인연 되어 온 사람과 함께할 수 있고,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어 좋다.
 
우리 눈앞에 펼쳐진 감각대상 너머에는 그것이 원리이고 바탕인 이데아가 있다고 했다. 세계와 그 너머세계를 구분하는 방식이 기독교와는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실제로 이데아론을 나중에 중세신학자들에 의해서 기독교적 세계와 신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된다. 이데아가 현실세계를 대비시킨 논리가 그대로 죽음을 안고 있는 지상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늘나라를 대비시키는 것으로 전용될 수 있다. 그것이 종교 이념의 진리요, 미지의 미래를 추종하는 인간들의 근본이 아닐까!
 
이데아를 인식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행복과 생명의 나라인 하늘나라를 눈에 보이듯이 손에 만져지듯이 그려주면 되지 않을까. 이데아의 불변성과 영원성이 이제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으로 번역된다, 감각적 세계와 세계의 대립은 허망한 ‘이’ 세계와 참된 ‘저’ 세계의 대립으로 바뀐다. 이데아를 볼 수 있는 지성의 눈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로 바뀐다. 이처럼 종교적 눈으로 보면 감각적인 현상세계가 헛된 세계는 아닐까!
 
폴라톤은 본의 아니게 목사자격증이 없는 목사인 셈이다. 목사와 신자는 기독교의 교리를 익히기 이전에 이데아론을 잘 익히는 것이 믿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닐까. “예수를 믿으면 천국 안 믿으면 지옥”이라는 말은 협박하기 이전에 먼저 플라톤처럼 우리가 왜 감각적 세계를 불신할 수밖에 없는지, 초감각적 세계가 왜 필요한지를 찬찬히 살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
 
이데아를 볼 능력이 없는 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의 세계를 볼 수 있을까요? 이런 사정을 무시하는 열렬한 성도들은 교회에 자주 가고 이해하기 힘든 성경을 자기 식으로 읽고 들은 대로 믿고 “아멘”을 자주 외치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까. 어느 종교나 그러하듯이 사이비교주나 아니면 종교의 목자라는 분이 등장을 하면 성도들은 신을 맞이하듯 온갖 난리가 난다. 뭘 믿는다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이 세계에 종교에 대한 무한 믿음의 시작으로 세뇌로부터 통습된 사랑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역사적으로 승자는 위치에 오른 사람은 하나같이 사람을 잘 부릴 줄 안다. 천하대업에 뛰어든 조조는 마땅한 인물이 없었든 탓에 스스로 계획하고 행동했다. 역사연구를 통해 인재등용의 중요성을 명확하게 이해했으며 남다른 감각으로 인재를 발탁하고 중용한다. 이방원의 첫째 양녕, 둘째 효령, 셋째 충녕대군인 세종대왕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함께 진 융합적이고 통습적인 왕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역사에서 영원히 기억되는 왕으로 남아 있는 이유이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올려볼 때 양녕대군의 20세 후손이라는 것이 때로는 자랑스러울 때가 있다. 
 
규제의 착각
성매매방지법이 제정이전보다 더 큰 부작용을 유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강력한 법을 제정하겠다는 것은 우려의 목소리를 나오게 한다. 인간의 행위 가운데는 반드시 법적으로 제재하고 처벌해야 하는 행위가 있다. 그러나 심각하게 사회질서를 문란하게 하거나 타인의 이익을 빼앗은 경우가 아니면 이러한 법적처벌에는 심사숙고해야 한다. 인간의 근본에 강하게 자리한 성욕이라는 쾌락의 본질을 적정한 법의 테투리 내에서 규제를 하는 것이 성에대한 권리를 존중하는 것은 아닐지.
 
인간에게 일탈을 위한 정상적인 해방구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개인의 의지로 조달할 수 없는 범죄행위를 제외하고는 함부로 국가가 나서서 법으로 개인의 선택을 제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수도를 터주지 않으면 상수도가 깨끗할 수 없다. 하수도가 더럽다고 막아버리면 그물은 역류하여 상수도를 오염시키고 결국에는 온 사회를 불건전한 환경으로 만들어 버리게 된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규제가 타당하고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커다란 착각이다.
 
내가 누구인가? 자아정체감을 형성해야 한다.

나이가 들어가지만 자기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미래를 추구하고, 도전하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가치관을 재 정립하고 다듬어 가는 자아정체감에 노력해야 한다. 한국사람은 75%가 '자아정체감'이 취약하고, 이 같은 '자아정체감' 부재가 자살률 1위를 나타내고 있다. 사회병리적 현상과 연관되는 것이다. 착각적 규제에서 벗어나야 하며 복합적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소통만의 시스템이인 소통 언어보다 확인하는 시스템과 상대의 감정을 확인하는 시스템 대화는 더욱 감각적 현실을 상대에게 심어주게 되고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제도적 통제와 착각적 통제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모든 사람들이 경영자들이다.
독일경영학(1675년 ‘완전한 상인’이 경영학의 시작이다.)과 미국경영학(1911년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의 원칙’)을 함께 접목할 필요가 있다. 독일경영학의 이론 중심과 미국의 실무중심의 경영학과 비교할 필요 있다. 미국경영학을 우선하는 것은 현실의 토대에서 비교분석할 수 있는 학문이라는 것은 패러다임(paradigm)의 학문적 장점일 것이다. 필자가 연구하고 결론에 접근하고 도출하는 부동산경제학 역시 시대적으로 생성될 수밖에 없는 학문들 중 하나이다.  
 
실증경제학과 규범경제학 역시 함께 연구할 필요가 있다. 
경제현상을 사실 그대로 분석하고 경제현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현실을 반영하여 경제를 이론적으로 분석하는 학문이면, 규범경제학은 경제적 공정성에 대하여 가치 혹은 규범적 판단을 표현하는 경제학의 한 부분이다. 가치판단에 의하여 바람직함과 바람직하지 못한 설명을 하는 학문이다. 포트폴리오 이론은 규범경제학에 속한다. 이러한 학문의 성질에 따라 경제를 다루는 시스템과 경제에 대한 이념의 차이를 크게 두게 되는 것이다.
 
공리주의의 재산권에 관한 시각 차이를 비교할 수 있다.
공리성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하는 사상, 행위의 옳고 그름을 그 행위가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늘리는데 얼마나 기여하는가 하는 유용성과 결과에 따라 결정된다고 본다. 공리주의는 효용행복 등의 쾌락에 최대의 가치를 주는 철학, 사상적, 경향을 통칭한다고 본다. 이러한 학문적 이론이 현실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것 또한 경제에 대한 이념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전 세계가 존경하는 박정희대통령의 경제철학을 보자.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계획경제(사회주의 경제정치) 정치를 했다. 담배값과 소주값, 목욕비와 이발료, 쌀값 등은 전국이 동일했다. 그러한 결과는 물가는 안정되고, 자본주의의 경제를 성장시킨 것이 원동력이 되어 오늘의 대한민국은 세계 속에 코리아를 외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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