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볼 곳 | 한양, 위화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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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 사람 | 정도전, 정몽주, 이성계 |
주요 사건 | 위화도 회군, 사전 혁파, 한양 천도 |
"명과 싸워서는 안 됩니다." 이성계는 출병에 반대하였다. 왕명을 어길 수 없어서 요동을 향해 갔지만, 결국 말 머리를 돌렸다. 그러고 나서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
1383년 가을,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북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여러 날 만에 도착한 곳은 함흥, 이곳에서 그는 이성계의 막사를 찾았다.
"훌륭합니다. 이 군대면 무슨 일인들 못 하겠습니까?"
고려 사회에는 대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신진 사대부 정도전, 전쟁터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지만 변방의 장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이성계, 두 사람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도전은 개혁을 추진하다가 권문세족의 미움을 사 여러 해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유배지에서 고통받는 농민들의 생활을 날마다 지켜보며, 개혁을 꼭 성공시켜야겠다는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였다.
정도전은 최영과 이성계야말로 개혁에 앞장설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였다. 두 사람 모두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면서 민들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마음 또한 깊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결국 이성계를 선택하였다. 최영은 명문가에서 태어나 왕에게 딸을 시집보낼 만큼 권세 있는 인물이었다. 그보다는 변방의 이름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자신의 능력 하나로 성장한 이성계가 개혁에 더 적극적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선죽교이성계 쪽으로부터 고려를 무너뜨리고 함께 잘살자는 제안을 받은 정몽주(1337~1392)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라는 시로 거절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 말 머리를 돌려라
신진 사대부들이 이성계를 중심으로 다시 세력을 형성할 무렵, 명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그들은 고려가 원에서 되찾은 쌍성총관부를 돌려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렇게는 할 수 없는 일,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였다.
우왕과 최영은 전쟁을 결의하였다. 그러고 나서 이성계에게 군대를 이끌고 요동으로 가 명과 싸우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전쟁에 반대하였다. 명과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왕명을 어길 수 없어서 요동을 향해 갔지만, 이성계는 결국 위화도에서 말 머리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고 나서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위화도 회군, 1388)
정권을 잡은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들은 곧바로 토지 개혁을 단행하였다. 권문세족이 가지고 있던 농장을 해체하고, 신진 사대부들에게 토지를 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문란하던 조세 제도도 손보아 농민 생활을 안정시켰다. 개혁은 농민과 사대부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에 자신을 얻은 정도전, 조준 등은 개혁을 완수하려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정몽주는 '개혁은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일 뿐'이라며 고려에 대한 충성심을 끝까지 지키려고 하였다. 결국 정몽주는 죽임을 당하였고, 고려의 운명도 끝이 났다.
압록강 한가운데에 있는 이 섬은 이성계가 왕명을 받들어 고려의 국경을 넘었지만 명의 영토에 들어가지는 않은 절묘한 곳이었다. 여기에서 이성계는 군대를 돌려 정권을 장악할 계획을 세웠다.
■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정몽주가 죽자 이성계의 즉위를 대놓고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결국 1392년 이성계는 왕위에 올랐다. 두세 번 사양하는 형식을 취하였으나, 이 일은 짜인 각본을 따른 것이었다.
이성계는 왕이 된 뒤 나라 이름을 그대로 고려라 하고, 고려의 제도와 관습을 존중하겠노라고 선언하였다. 고려 때의 관리들에게도 전처럼 나와서 일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데 이성계의 요청을 따르는 관리들은 많지 않았다. 그대로 관직에 머무른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 개성 두문동으로 옛 고려의 관리 100여 명이 들어갔는데, 이들이 마을 밖으로 나오도록 위협하면서 불을 질렀더니, 타 죽으면서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한번 들어가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는 뜻의 '두문불출'이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이성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었다. 그 옛날 하늘의 자손인 단군이 세운 단군 조선과 유교 윤리에 따라 이상적인 정치를 폈다는 기자 조선1)을 계승하겠다는 뜻이다.
또 새 왕조가 유구한 역사와 개혁성을 갖추었음을 과시한 것이었다.
■ 새 도읍지, 한양
이성계 일파는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니 도읍을 옮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계룡산을 비롯하여 여러 곳을 후보지로 정한 다음, 일일이 장단점을 따졌다.
새 나라의 도읍지로 최종 결정된 곳은 한양이었다. 산세가 좋아 적을 막기에 유리하고, 가까이에 강이 있어 조세 운반에 좋으며, 국토의 가운데에 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된 것이다. 게다가 고려 때부터 남경(한양)이 새 도읍지가 될 것이라는 예언도 있었으니, 도읍을 옮기면 불안한 민심도 가라앉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궁궐을 짓고 도성을 쌓는 일은 수십만 명의 민이 동원되는 엄청난 공사였다. 이때 동원된 민들은 필요한 식량과 도구를 스스로 부담하여야만 했다. 공사는 민들에게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때 민들의 원성을 담은 노래가 아직도 전한다.
남산에 돌 캐러 가노라면
정 남은 게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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