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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살며서도 이 아름다움을 보지 못했네요.

문화예술·건축물의 미학

by 포근한 사람 2016. 8. 2.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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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보지 못한 부산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물놀이와 일광욕을 쏙 뺀 여정은 동에서 서로 이어진다.
기장에서 다대포까지, 횡으로 질렀다.

부산 횡단
부산 횡단

억센 빗방울이 차창에 꽂힌다. 기차는 장마전선과 함께 부산으로 남하한다. 냇물이 불어나는 것만큼 녹음도 흥건한 계절. 궂은 날씨를 굳이 걱정하진 않았다. 애초에 해운대에서 물놀이하며 일광욕을 즐길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 차라리 남녘의 한여름다운 훗훗한 공기와 장쾌한 비바람, 산복도로를 감싼 짙은 운무, 서핑하기 좋은 너울이 낭만을 더하리라 기대했다. 사실 이번 부산행에 앞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부산’을 만나고 오겠다는 나 름의 결심이 있었다. 그리하여 여정은 기장에서 다대포, 방위상으로는 도시의 동쪽에서 서쪽까지 늘어질 것이다. 매년 들르는 횟집과 시장은 일정에서 과감히 들어냈다. 대신 기장의 어촌 마을로부터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해수욕장들, 익숙한 듯 새로운 원도심의 골목들, 송도와 다대포의 신비로운 바닷길을 차례로 거닐어볼 작정이다.

아트인오리
아트인오리
1, 3‘아트인오리’의 무인 카페에서 짧은 휴식을 가졌다. 비 오는 아침이라 인적도 없었다. 조용히 커피를 내려 마시고 라디오를
듣다 자리를 떴다.

죽성성당
죽성성당
2죽성성당의 이국적인 풍경 앞에서 공간감을 상실했다.

아트인오리
아트인오리
송정 바다
송정 바다
4송정 바다에 뛰어드는 젊음들. 비가 내리니 더 신났다.

국보미역국
국보미역국
기장혼 국보미역의 ‘국보미역국’엔 참가자미가 통째로 들어간다.

안개 속의 마을, 기장부터 송정까지

첫 번째 행선지는 기장군 죽성리다. 먼 옛날 고산 윤선도의 귀양지였던 이곳엔 그의 쓸쓸한 마음을 달랬을 작은 솔숲이 있다. 인근엔 학의 날개처럼 뻗은 황토색 바위, 황학대가 자리한다. 파도가 바위에 부서질 때마다 피어오르는 묘연한 아름다움이란 달리 설명할 길도 없다. 그 아래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이국적인 성당 하나가 오롯이 서 있다. 죽성리로 발을 잡아당긴 건 바로 이 풍경을 담은 사진이었다. 북유럽 어느 바닷가 마을의 것처럼 고풍스러운 성당의 정체가 궁금했는데, 알아보니 드라마 세트장으로 지은 빈 건물이라고 한다. 실망하기엔 너무도 근사한 이정표라, 일단 한번 달려가보기로 했다. 바다에 닿아갈수록 해무는 한층 짙어졌다. 내비게이션이 도착을 알리는 자리에선 당장 아무것도 시야에 들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서야 겨우 성당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안개가 걷히길 기다리니 가까운 바위부터 선명해진다. 머지않아 등대 앞에 머리를 조아린 채로 고여 있는 몇십 마리의 물새가 나타난다. 눈앞에 신비로운 마술이 흐르는 듯하다. 때마침 어디선가 드레스와 연미복을 차린 커플이 다가와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홀연히 떠나간다. 이 모든 게 한 폭의 움직이는 삽화 같다. 장안읍 오리의 대룡마을로 걸음을 뗀다. 근방의 소담한 예술촌 ‘아트인오리’ 를 향하는 길이다. 창고를 개조한 무인 카페와 국숫집 앞마당엔 무인 채소 카트가 객을 반긴다. 비 오는 아침, 아무도 없는 공간엔 라디오만 왕왕 흘러나온다. 천장이며 벽면에 빼곡한 메모지들을 보면서 여기 머물렀을 이들을 헤아렸다. 풋풋한 고백에서부터 청순한 시구까지 이런저런 문장들을 읊어보다가 박스에 돈을 넣고 (1만원을 넣었는데 거스름돈은 받지 못했다) 커피를 뽑았다. 굵어졌다 잦아들었다를 반복하는 빗방울은 뒤뜰의 조각에도 송골송골 내렸다.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시며 그 모습을 한참 구경했다. 안온하던 시간을 뒤로하고 첫 끼니를 먹으러 아랫동네로 내려간다. 송정에 좀 못 미쳐 자리 잡은 ‘기장혼 국보미역’에 당도했다. 얼마나 그 맛이 대단하기에 기장의 ‘혼’이며 ‘국보’일까. 참가자미 한 마리를 통째로 넣어 끓인 대표 메뉴 ‘국보미역국’을 한 입 떠 넣은 순간, 그 이유를 절로 깨쳤다. 통통한 어육과 맑은 미역 국물이 입안으로 밀려 들어왔을 때, 이 부산 앞바다를 한 움큼 쥐어 삼킨 듯한 기분을 느꼈다. 식탁 옆의 창가 너머로는 미역 건조장이 내다보였다. 이것이 기장 바다의 절절한 맛이로구나. 꽁치구이부터 빈대떡까지 다른 찬들도 풍성했다. 지칠 때까지 겨우 먹고서야 자리를 털었다. 좀 더 내려가면 송정이다. 벌써부터 물 만난 고기처럼 성난 파도를 만난 서퍼들이 몇 무리씩 나와 있다. 이들은 맑은 날보다 궂은 날을 사랑하는 족속이다. 커다란 너울을 기다리는 서프보드들이 회청색의 바다를 색색으로 물들였다. 요 몇 년 사이 서핑학교 근처에는 전망 좋은 커피숍과 레스토랑이 속속 들어섰다. 이리저리 들쑤시며 구경하다가 터줏대감 격인 카페 그림하우스 옆에 새 단장한 가게 하나를 발견했다. 뒷마당 풀숲을 그대로 끌어들인 듯한 공간,비올레아뜰리에’다. 늘어뜨린 화분과 선인장들, 빈티지한 욕조와 조개껍데기를 닮은 향초, 비누들이 얼기설기 널려 있는 모습이 아열대의 정원을 떠올리게 한다. 송정을 둘러보면서 느낀 것인데, 체감상 이곳의 표준시는 아무래도 서울을 앞지르고 만 것 같다.

이바구길 모노레일
이바구길 모노레일
1이바구길 모노레일이 정차 중이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렸을 마을 사람들의 소중한 이동수단이다.

브라운핸즈 백제
브라운핸즈 백제
2 브라운핸즈 백제는낡음과 예술을 절묘하게 조화한 공간이다.

정란각
정란각
3 정란각의 마당에 장맛비가 고인다.

신발원
신발원
4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최고의 맛집, 신발원의 오전 개점 풍경. 고기만두를 맛보려는 사람들이 벌써부터 늘어선다.

어제, 오늘, 내일이 교차하는 원도심 탐방

그리하여 시계를 매만진다. 이번엔 좀 더 과거로 돌린다. 수정동, 초량동, 영주동, 보수동을 아우르는 부산의 코어, 원도심으로 향하는 길목. 이 권역은 부산의 과거와 현재가 전위적으로 뒤섞인 공간이다. 우선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수정동 일본식 가옥 정란각부터 들여다본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 관리하고 지역 문화 커뮤니티 ‘문화공감 수정’이 운영하는 이 건물은 현존하는 일본식 가옥 중 보존 상태가 가장 훌륭한 것으로 꼽힌다. 전통 일본식 다다미와 은은한 툇마루, 견고한 마룻바닥과 계단, 독특한 창호 문양 등이 퍽 아름다우나 아픈 과거를 떠올리면 마냥 기꺼운 마음으로 보기는 힘들다. 꽤 오랜 세월 보존을 위해 출입을 금했으나 지난 6월부터 빗장을 풀고 대중에 공개했는데, 이내 게스트하우스로도 이용한다니 다소 급진적인 변화가 아닌가 싶다. 다만 오래도록 이 공간을 기다렸을 누군가에겐 좋은 기회인지도 모르겠다. 이 건축물의 존재 의의를 제대로만 되새긴다면 말이다. 또 다른 옛 건물의 활용 방식을 엿보러 초량동으로 내려간다. 예스러운 벽돌 건물이 눈에 띈다면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1922년 최초의 근대식 병원으로 지어진 백제병원을 최근 점거한 것은 디자인 가구 브랜드 브라운핸즈다. 이들은 본거지인 서울에서부터 낡은 건물을 자신들의 방식대로 개조해 쇼룸 겸 카페로 사용해왔다. 자동차 정비소를 고쳐 쓴 도곡점, 버스 차고지를 활용한 마산점, 그리고 낡은 병원을 리모델링한 브라운핸즈 백제 초량점까지. 붉은 벽돌, 곳곳이 허물어진 천장과 창틀, 이가 빠진 타일을 그대로 살려 세월의 흐름을 전시하는 이들은 여기서도 여지없이 자신들의 주특기를 발휘해놨다. 빛바랜 모퉁이에 놓인 주물 가구들과 볼캡을 눌러 쓴 젊은이들의 이질적이면 서도 독특한 조화는 이 공간을 규정하는 풍경 그 자체다. 초량동을 걷다보면 어느새 붉은 간판의 출현 빈도가 높은 거리를 마주한다. 차이나타운. 원도심 구경에 기력이 다했다면, 60년 전통의 식당 ‘신발원’에 가볼 일이다. TV 프로그램 <백종원의 3대 천왕>에 등장해 유명세를 탄 이후론 늘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맛있는 군만두와 이색적인 중국식 간식 ‘콩물’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화교인 곡서연, 수의덕 모자는 대를 물려 신발원의 만두를 빚는 수장이다. 이들이 구현하는 음식은 발효 반죽 단계를 줄여 두꺼운 피를 만들고 질감을 살린 산둥식 바오즈에 가깝다. 일단 한번 베어 물고 나면 혀끝에서 계속 맴도는 맛, 자꾸 생각나서 괴로워진다. 만두뿐 아니라 천진꽈배기, 공갈빵, 전병 등 전통 중국식 베이커리도 풍성하다. 그러니 서울에서도 흔한 어묵을 사 갈 바에 이곳의 진귀한 빵들을 기념품으로 사두는 게 좀 더 특별한 선택이 아닐까 싶다. 다시 든든한 걸음으로 굽이치는 언덕을 올라가 본다. 일단 이바구길부터. 이 거리의 실질적인 기점은 이미 지나온 백제병원이다. 남선창고 옛터, 초량교회, 이바구길 출신 예술인들을 그린 담장까지 지나면 이바구 모노레일 정거장에 당도한다. 가파른 골목길이 이어지는 주택가, 계단을 쉼 없이 오르내려야 하는 주민들을 위해 얼마 전 모노레일을 설치한 것이다. 관광객들에게는 뜻하지 않게 고마운 이동수단이 됐다. 마침 이 동네 사는 아이들의 하교 시간을 맞닥뜨렸기에 얼굴을 부딪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눴다. 눈을 반달처럼 만들곤 “누나는 부산 사람 같아요” 하던 소년은 모노레일을 타고 다시 아래 정거장으로 내려갔다. 모노레일 속이 시원해서 땀을 식히고 가겠다고 했다. 소년이 내려간 자리를 한참 응시하는데, 문득 부산의 골목골목이 훤히 내려다보일 만큼 높이 올라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장관을 제대로 조망하기 위해 ‘역사의 디오라마’ 전망대로 한 번 더 걸음을 옮겼다. 당장엔 허리케인보다 매서운 기세의 비바람을 헤치고 언덕 꼭대기를 등정했다. 전망대 끄트머리에 닿았을 때, 발아래로 ‘산복도로의 롤러코스터’라 불리는 86번 시내버스가 막 커브를 도는 참이었다. 버스는 덜컹거리는 차체를 이끌고 언덕을 내려갔다. 전쟁통을 피해 산을 올라 생활 터전을 꾸린 이들의 고단한 역사를 가로지르면서. 가로등이 별처럼 빛나기 시작할 즈음, 다시 발길을 돌려 부산의 숨은 야경을 찾아 떠났다.

태종대
태종대
1태종대는 부산 여행의 필수 코스로 꼽히지만 수국 필 때 맞춰 가긴 쉽지 않다. 환상의 타이밍에 태종사를 찾았다.

86번 버스
86번 버스
286번 버스는 부산 원도심을 휘도는 롤러코스터다. 산복도로 전망대에서 이 버스를 조우했다.

다대포
다대포
3다대포의 신비로운 야경. 물가엔 풀들과 안개가 뒤엉켜 있다.

바다 위를 거닐다, 송도와 다대포

서부산 권역으로 넘어왔다. 보통 송도, 다대포, 을숙도, 가덕도까지를 부산의 최서단으로 본다. 이곳은 교통편이 좋질 않아 어지간한 이유를 가진 여행객이 아니라면 굳이 내려오는 경우가 없다. 우리의 분명한 이유는 새로 개장한 송도해수욕장 스카이워크를 보고, 다대포의 생태공원 나무 데크를 거닐며 바다 위를 산책하겠다는 것이다. 우선 송도는 대한민국 최초의 해수욕장이다. 2013년 개장 100년을 맞았지만 해운대, 광안리의 이름에 치이면서 외지인들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그러던 것이 몇 년 전 거북섬 근처의 해상 산책로 ‘송도 스카이워크’를 개장한 이후부터 활기가 돌기 시작했고, 올여름 재개장 이후 본격적으로 젊은이들의 발길을 잡아 끄는 중이다. 화창한 낮이라면 바다 위를 걸었겠지만, 비바람 부는 밤이라 겨우 눈으로만 조명 빛이 드문드문한 산책로를 더듬었다. 멀리 안개 낀 고층 아파트의 풍채와 어우러진 탓에 우울하면서도 낭만적인 디스토피아의 정경이 펼쳐졌다. 좀 더 내려가 마지막 행선지 다대포에 닿았다. 다대포는 말 그대로 ‘크고 넓은 포구’라는 뜻을 가진다. 여기엔 낙동강의 흙모래가 퇴적지형을 형성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해수욕장이 있다. 이곳의 독특한 해안사구는 동서를 가르며 이어진다. 멀리로는 낙조분수와 수변공원 산책로가 펼쳐지는데, 빛을 따라 늘어선 길 끝엔 흰 기둥들이 모인 조각작품이 서 있다. 밤바다가 뿜어대는 명상적인 기운에 한동안 그 앞을 서성댔다. 올 11월이면 여기까지 부산 도시철도 1호선이 닿는다고 한다. 역에서 바로 해수욕장과 연결된다는데,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이 호젓함도 머지않았나보다.

에필로그, 비 오는 날의 태종대

날이 밝았다. 흐린 하늘처럼 잔뜩 망설이다가, 택시를 잡아타고 부산의 클래식 여행 코스인 태종대를 향했다. 축제는 끝물이지만 수국 꽃은 한창이라기에. 비가 내리는 폼새는 여전했지만, 숲과 꽃과 절간의 모습은 운무에 잠긴 덕에 한층 아름다웠다. 이 계절의 아름다움을 한 장면으로 표현해야 한다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싱그러운 해풍과 부슬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전망대까지 걸었다. 배 한 척이 외딴섬들을 돌아 멀어져가는 모습을 바라볼 때, 이 여름의 가장 깊숙한 데까지 다다른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걷고 부산역으로 돌아왔다. 기차 시간까진 아직 여유가 있다. 하릴없이 1층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았더니, 창 너머로 구봉산의 순백색 구름 모자가 어른거린다. 낯설어서 아름다운 부산의 표정은 이곳에서도 여지없이 펼쳐진다. 이렇게나 올올이 새로운 부산이라니, 참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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