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검색엔진을 이용해 ‘제주 이시돌목장’이나 ‘제주 웨딩 촬영’ 등을 입력하면 파란 하늘 아래 마치 드럼통을 반으로 쪼개놓은 것과 같은 낡은 건물을 배경으로 친구끼리 혹은 결혼을 앞둔 연인이 찍은 사진이 무더기로 눈앞에 펼쳐진다. 일상을 떠난 이들이 제주 한림읍 금악리 이시돌목장을 찾아 소중한 시간을 추억으로 남긴 사진들이다. 이 건물을 마주 대하면 “…오랜 시간을 순명하며 살아나온 것/ 시류를 거슬러 정직하게 낡아진 것/ 낡아짐으로 꾸준히 새로워지는 것/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고 한 박노해 시인의 음유가 가슴속 울림으로 전해진다.
■제주 이시돌목장의 ‘테시폰’
55년 전인 1961년에 지어진 것이니 이제 막 반세기를 지났을 뿐인데도 마치 고대 유적을 대하는 느낌과 다를 것이 없어 새것만을 찾는 스스로를 질타하게 된다. 이 구조물은 ‘합판을 세워 윗부분의 양끝에 못을 박고 쇠사슬을 늘어뜨린 뒤 그 모양을 따라 합판을 오려내 거꾸로 세운 뒤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곡면 모양의 목재 형틀을 여럿 만들고 이를 줄줄이 세워 물 뿌린 가마니를 덮은 다음 모래와 시멘트를 섞은 반죽을 그 위에 3~4회 덧씌워 지었다’는 테시폰이다.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 제주로 부임해 이시돌목장을 개척한 맥그린치(P James McGlinchey) 신부가 척박했던 제주의 개척농가 살림집과 양돈장 등으로 쓰기 위해 1961년 지은 건축물이다.
제주 이시돌목장에 농가 주택과 양돈장이 세워질 무렵인 1960년 서울은 인구 200만명을 넘어섰다.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인해 서울시는 경기 지역의 12개면 90개리를 새로 편입했는데 이때가 1963년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 서울시는 한강 이남 지역에 10년에 걸쳐 12만가구 60만명이 살아갈 ‘남서울 도시계획’을 발표했고, 같은 해 착공한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1969년 말 완공돼 오늘날 서울이 골격을 갖추게 됐다. 하지만 당시 서울의 중심은 단연 강북이었다.
1966년 신문에 연재됐던 이호철의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에 담긴 풍경도 강북 일색이다. 복실 어멈의 남루한 인생, 종삼에서 죽어나가는 미경, 찢어지는 가난을 피해 서울로 상경해 국화다방 레지를 거쳐 셋방에서 몸을 파는 길녀, 길녀와 만나 삶의 무게를 견디는 이리 출신의 책장수 상현, 그리고 석표에서 동국으로, 다시 동표로 이름을 바꾸면서 삶을 살아낸 이들이 당시 서울시민이었고, 이들은 모두 강북에서 집 없는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최초의 민선 서울특별시장이었던 11대 김상돈 시장은 5·16 쿠데타로 임기를 6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 자리는 쿠데타 참여 인물로 만주 신경군관학교 출신인 윤태일 시장이 차지하고 1963년 12월까지 재임했다. 또한 5·16 쿠데타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 육사 8기 졸업생이자 5·16 쿠데타에 참여한 장동운 대령이 현역 군인으로 대한주택공사의 전신인 대한주택영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이들은 모두 서울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에 대응해 새로 편입된 서울 교외지역에 서민주택을 어떻게 하면 빨리, 많이, 싸게 지을 것인가에 골머리를 썩였다.
이들의 각오와 다짐은 판자촌과 불량주택들을 없애고 그곳 사람들을 새로 편입한 서울의 교외 주택지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쉽게, 빨리 지을 수 있는 시험주택을 고안해 시험 삼아 지어본 뒤 성능과 비용, 공기 등을 검토해 다른 외곽지역에 확대하기로 결정했고, 대상지로 서울 수유리 국민주택지구를 선정했다. 장동운이 이끈 대한주택공사 주택연구소는 A~F형의 6가지 시험주택을 고안해 제시했고, 수유동 국민주택지구에는 주택공사가, 구로동에는 서울시가 이를 건설했다. 이것이 ‘63 시험주택’이다.
■‘63 시험주택’과 ‘이시도레식’ 주택
‘63 시험주택’ 가운데 B형은 다른 것들보다 20여일 늦은 12월10일 준공되는 바람에 11월20일에 열린 언론 공개행사에는 선보일 수 없었다.
19평형짜리 단독주택인 시험주택 B형은 모양이 매우 특이했다. 이를 설명할 방법이 마땅찮아 ‘흡사 구름다리처럼 생긴 집’이라고 했고, 주택공사 기술자들 역시 ‘벽체와 지붕을 한꺼번에 시멘트 모르타르로 지을 수 있는 쉘 구조’인데 ‘미군용 퀀셋을 조금 아름답게 변형한 것’이라 얼버무렸다. 뿐만 아니다. 다른 시험주택과 달리 ‘평면은 건설업체의 제안에 따랐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1963년 7월에 작성된 설계도에는 ‘시험주택 B형’이라는 이름과 함께 ‘이시돌식’ ‘이시도레식’ 등의 별칭이 함께 표기돼 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일컬어 ‘삼안식’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수유리 시험주택 B형의 별칭으로 사용되는 ‘이시돌식’ 혹은 ‘이시도레식’이라는 수식어는 곧 제주 금악의 ‘이시돌’이라는 목장 이름에서 연유했고, ‘삼안식’이라는 별명은 대한주택공사가 수유리 시험주택 B형을 지을 때 ‘평면은 건설업체의 제안에 따랐다’고 했던 건설업체가 바로 삼안산업주식회사였기에 비롯된 일이라고 추측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실제 그러했기 때문이다. 비록 2년 정도의 간극이 있지만 이들은 ‘일란성 쌍둥이’인 것이다.
올해 2월 초 서울시는 인터넷 온라인사이트 ‘서울사진아카이브’를 통해 10만장가량의 사진을 공개했는데 이 가운데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삼안식’으로 불리는 서울 구로동 시험주택이 포함돼 있다. 군복 차림의 윤태일 서울시장이 짧은 지휘봉을 들고 구로동 주택가를 시찰했다는 설명이 붙은 1963년 11월5일의 사진 꾸러미에 온전한 모습을 한 구로동 이시도레식 주택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이를 기초로 서울시 항공사진서비스를 통해 그 위치와 내용을 추적해보니 1972년에 구로동 일대에 온전한 형태의 이시도레식 주택 17채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모양이 모두 제주 이시돌목장의 테시폰 주택이나 수유리 시험주택 B형과 같다.
1963년 10월22일자 경향신문 기사를 보자. “지난 9월10일부터 구로동과 수유동에서 착공된 이시돌식 주택은 지붕이 흡사 구름다리처럼 생긴 집이며 앞으로 구로·오류·미아 등에 시영주택 1040동을 지을 예정인데 우선 구로동에 40호를 시범으로 짓는다. 특히 이시돌 주택의 특허를 받은 삼안산업과 다른 회사 한 곳이 자비로 주택을 먼저 지은 다음 분양할 때 그 비용을 되돌려 받는 방식을 택했다.”
이시돌 주택의 특허를 삼안산업이 받았다니? 그렇다면 구로동 주택에 비해 2년이나 먼저 지어진 제주 이시돌목장의 농가 주택은 삼안산업의 특허권을 침해했단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특허 기록으로 확인해보니, ‘돔형 건물의 주벽체’라는 특허는 분명 이시돌목장의 대표인 피제·메·그렌지(맥그린치 신부)에 의해 1963년 2월23일 출원되었고, 같은 해 5월20일 등록·공고됐다.
그런데 등록 이후 특허권 이전에 관한 항목에는 ‘등록권자의 허락에 의하여 1963년 8월12일부터 1973년 7월27일까지 10년간 전국에서 제조, 판매, 사용 및 확포에 대한 실시권을 삼안산업주식회사가 갖도록 한다’고 기록돼 있다. 즉 제주 이시돌목장의 테시폰 주택 특허권을 가진 맥그린치 신부가 특허 사용권한을 삼안산업에 10년 동안 양여했기 때문에 삼안산업은 수유리와 구로동에 주택을 대량 보급하면서 ‘삼안식’이라는 일종의 브랜드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폭발적인 서울로의 인구 집중, 서울 시역(市域)의 확장, 교외주택지 개발과 저렴 주택의 공급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일종의 브랜드까지 만든 삼안산업주식회사의 설립자는 예관수라는 인물이다. 그는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의 1기 후배로서 1955년 대령으로 예편한 뒤 1963년 삼안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서울특별시장-대한주택공사 총재-민간건설회사 대표가 모두 5·16 쿠데타에 참여한 군인들이었다는 사실은 자못 흥미진진한 대목이다.
■그리스에서 제주로…건축기술의 여정
이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주 언급했던 ‘테시폰(Ctesiphon)’에 대해 얘기할 차례지만 그에 앞서 설명해야 할 인물이 있다. 아일랜드의 엔지니어 제임스 월러(James Waller)다. 그는 호주에서 태어났지만 아일랜드로 이주해 공과대학을 졸업한 전문가로서 1913년에 동료와 함께 건축구조 전문업체를 설립했고, 1937년부터 1940년까지 ‘테시폰 시스템(테시폰 헛)’이라 불리는 구조원리와 공법을 완성한 인물이다. 그는 20세기 초 아일랜드의 철근콘크리트 구조 발전과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건축구조 기술 개발로 건축기술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대개의 엔지니어들이 그러하듯 제임스 월러 역시 제1차 세계대전에 영국군 공병으로 참전했는데 그리스 살로니카 전투에서 물에 젖은 텐트에 시멘트 가루가 부착되면 상당한 강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통해 섬유질 재료를 목재 형틀에 엮은 뒤 시멘트를 반죽해 텐트 천 위에 붙이는 공법을 착안하게 된다. 월러의 아이디어는 이라크 바그다드 근처의 사막에서 발견된 고대 왕국 테시폰의 거대한 아치 구조물 유적을 1922년에 방문하며 다시 발전했고, 회사로 돌아온 뒤 합판 양끝에 핀을 꽂고 체인을 늘어뜨리면 생기는 자유로운 곡선을 이용한 구조 원리를 터득해 다채로운 실험과 시험 시공을 거쳐 기술을 완성했다. 그는 이 기술을 ‘테시폰 시스템(테시폰 헛)’이라 명명하고 유럽과 미국 등에서 수많은 특허를 획득했다.
그가 고안한 테시폰 시스템은 1940년부터 1970년까지 영국, 아일랜드, 짐바브웨, 탄자니아, 나이지리아, 호주, 스페인, 그리스와 인도 등에서 다양하게 적용되었는데 대부분 주택, 창고, 대규모 축사나 공장 혹은 격납고 등으로 사용됐다. 지금까지도 많은 엔지니어에 의해 그의 구조적 원리와 성과가 계속 발전하고 있다.
그는 아일랜드를 기반으로 활동했고, 제주 이시돌목장을 개척한 맥그린치 신부도 아일랜드 사람이다. 제임스 월러와 맥그린치 신부가 아일랜드에서 머문 시기 일부가 겹쳤고, 맥그린치 신부는 이미 아일랜드와 콜롬반 신학교에서 듣고 보았던 다양한 크기와 용도의 테시폰을 4H클럽 학생들과 실험한 뒤 개척농가를 위해 이를 대량 보급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을 기초로 한국에 특허를 출원해 등록한 뒤 그 실시권을 당시 도급순위 상위에 자리하고 있던 삼안산업에 이전한 것이다.
결국 1940년부터 유럽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용된 제임스 월러의 테시폰 시스템이 맥그린치 신부에 의해 우리나라 제주의 이시돌목장에서 최초로 구현됐고, 그 핵심 기술이 서울의 폭발적 인구 증가에 따른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채택돼 대한주택공사의 수유리 시험주택 B형과 서울시의 구로동 시영주택에 삼안산업을 통해 적용되었던 것이다.
제주 이외의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테시폰 주택이 제주에는 거의 버려진 상태로 여럿 방치돼 있고, 해가 거듭할수록 줄고 있다. 이에 반해 영국과 아일랜드, 스페인, 호주, 피지 등의 국가에서는 제임스 월러가 창안한 테시폰 시스템이 갖는 문화사적, 건축사적, 기술사적 의미를 높이 사서 국가 지정 문화재나 근대건축유산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버리는 시대,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의 착잡한 실상’이라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언설은 단지 황정은의 장편소설 <백의 그림자>에 등장하는 세운상가에 그칠 일은 아니다.